2004년에 이곳을 찾아오신 분이거나, 만화로도 영화로도 <음양사> 를 본 적이 없으시다면,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지금 리스트에서 만화 음양사 이야기를 먼저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카노 레이코의 만화 <음양사> 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은 몇 년 전부터 은근히 골수 팬들을 설레게 해 왔었는데요. 세이메이 역에 처음 보는 얼굴이 캐스팅되고, 영화 제작 뒷 이야기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고, 그리고 개봉 소식을 듣고, 음양사 1편이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소식들을 들으면서 점점 기대가 커졌어요. 반면 한국 개봉에선 엄청난 조소와 함께 흥행에 참패했다는 이야기 역시 들었습니다. 역술인들을 미리 불러다가 시사회를 했다는 우습지도 않은 소식 역시 들었고요. 그리고 이어진 음양사 2의 개봉. 그리고 한국에서 쏟아진 혹평들을 보면서 불안했습니다. 역시 영화화는 무리였나... 하고요.
영국에 있는 탓에 음양사 시리즈를 각각 극장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오늘 음양사 1편 2편을 한꺼번에 몰아서 봤습니다. :) 건방을 떨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어지간히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영화에서 기대하는 장면들이 꽤 되었어요. 게다가 작년 2003년은 아베노 세이메이 사망 1000년이 되는 해였기에, 그해에 개봉한 음양사 2에 대한 기대는 정말이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의 소감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화 좋았어요. 문제가 영화에 있었던 게 아니더라구요. :)
저 역시 일본 만화와 일상을 거의 분리하지 않는 수준의 삶을 살아오고는 있습니다만, 일본 만화가 인간 버린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고증이나 조사가 잘 된 일본 만화는 어지간한 전문서보다 낫지 않겠어요? 특정 주제/소재의 일본 만화들이 매력적인 건 바로 이 전문성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고 있다는 데 있을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화로만 <지식> 을 습득한 잘나 빠진 인간들이 한국에는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이라던가 홍차왕자, 그리고 이외에도 숱한 걸작 만화들은, 뭐가 뭔지도 실제로는 구별 못하면서 겉멋만 잔뜩 들린 엉터리 선무당 자칭 미식가들을 대량으로 (특히 인터넷에) 양산했고요. 만화에서 본 역사적 사실만으로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대는 인간들도 저 어디 인터넷 세상에는 한바가지인 것 같아요. 이게 다 너무 자세히 설명해 주고 너무 자세히 공부 시켜주는 일본 만화 때문이 아니고 뭐겠느냔 말입니다.
만화 <음양사> 역시, 대중적이지는 못했지만 정말 많은 마니아층(횡적인 의미에서의)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는데요. 매력적인 소재와 아름다운 그림체로 일단 먹어주고 들어가는 만화입니다만, 아쉽게도 이 만화는 그다지 친절한 만화는 아니예요. 스토리 이해에는 문제가 없지만, 기저에 깔린 숨은 의도를 이해하려면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곤란한 소재들이 만화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스토리 작가 우메마쿠라는 진짜 음양도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듯 보입니다. 오카노 레이코의 아름다운 그림은 그 어려운 세계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만화로 구현시켜 좋은 것이고요. 솔직히 대중을 대상으로 한 만화로 다루기에는 꽤 전문적인 용어나 그림들이, 독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형태로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나마 한국 번역 작가는 아예 글자 자체를 틀리게 해석한 상태에서 계속 번역을 진행시켜 놓았고요. (오카노 레이코가 한국 번역판 보고 나서 한국에선 번역판 안 내겠다고 공언했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에 영화가 개봉되었으니, 한국에서 혹평을 받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겁니다. 왜냐면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하나 하나 다 설명해 주고 잘난척 할 꺼리를 만들어 줄 단어들을 충실히 제공해 주는 여타 일본 만화들하고는 다르게, 만화 <음양사> 에는 설명이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예쁜 그림과 신기한 스토리에만 눈을 주다 영화를 실제로 보니 만화의 그 이쁜 세상은 다 어디로 갔나 싶었겠지요. 장면 장면들이 의도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리가 없으니 그냥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실사가 지루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기껏 와이어줄이 보였네 액션이 유치하네 컴퓨터그래픽이 잘못되었네 라는 코멘트 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만화 <음양사> 에 친절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도 굉장히 현학적인 척 하는 코멘트들이 오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비꼬는 듯한 말투를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화평들을 보면서 조금 재미있었던 게, 어째 죄다 그래픽이 어설프네 어쩌네 하는 소리만 있고 영화의 내용이라던가 등장하는 배우들에 대한 평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자기가 이 영화를 이해 못해서 재미 없었다고 적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음양사>는 만화였던 영화였든 기본적인 지식이 없이는 도저히 기저에 깔려 있는 의미를 헤아리기 힘든 만화였던 거예요. (결국 만화 <음양사>가 한국에서는 그림체와 수퍼내추럴한 소재로밖에 자리매김이 안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자기가 이해를 못한다고 대상을 까대는 건, 그리 나이스한 자세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 결국 그건 <나 이거 사실 아무것도 몰라> 라고 고백하는 거 밖에는 안 되는 자세이지 않겠어요?
영화 <음양사> 를 이해하려면 일단 만화를 보셨어야 합니다. 일례로 음양사 1편은 300년 전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갔다가 다시 세이메이의 시대로 되돌아오는데요. 300년 전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간 씬에 등장하는 여인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젓가락으로 뭘 집어서 먹는데요. 이것 역시 영화에서는 눈꼽만큼도 설명이 안 되지만 정말 중요한 모티브고요. (이건 만화에서는 4권까지 가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시간적 시점을 다중적으로 섞어서 보여주고 있어요. 여기에,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영화에는 등장해서 세이메이와 대결 구도를 이루게 되는데요. 영화 속 대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의 주술은 실제로 그 당시 헤이안교의 음양사들이 썼던 주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이 주문의 고증에 아주 세세한 주의를 기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부분은 한국어판 자막에서는 아예 해석조차 시도가 안 되었으니, 영화의 매력이 여기서부터 일단 접힌 거였지요.
노무라 만사이. 아베노 세이메이를 연기한 이 배우는 영화 출연이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20년 전에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답니다. (이걸 발견해내시는 분에게는 무한한 친근감+반가움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 대단히 훌륭한 세이메이를 연기했습니다. 발성에 카리스마가 있고, 역시 쿄겐(狂言)계의 스타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는 노무라 만사이의 세이메이 말고는 도저히 다른 사람의 세이메이를 상상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대를 모았던 히로마사 역의 이토 히데아키는... (웃음), 아주 이 역에 딱 맞춘 듯이 잘 맞습니다. 평소에도 순진하고 착하고 열정만 넘치는 어리버리 청년, 이라는 컨셉이 너무 잘 어울리는 이토 히데아키(드라마 <야차> 는 제외입니다. ^^)는 정말 영화 내내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음양사 1편, 2편 모두 세이메이와 대립하는 구도에 서 있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1편에서는 사나다 히로유키가 연기하는 도손이 그랬고요. 2편에서는 나카이 키이치가 연기하는 겐카쿠가 그러했습니다. 두 배우 모두, 사토 코이치와 함께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본의 중년 남자배우들인데요. 노무라 만사이의 세이메이를 보는 즐거움 못지 않게,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주던 두 중견 배우의 모습을 1편과 2편에서 확인하는 즐거움이 정말 컸습니다. 사나다 히로유키는 특히 시대극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배우인데요. 1편에서 노무라 만사이의 세이메이에 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2편의 나카이 키이치는, 한국에도 알려진 <올빼미의 성> 그리고 최근 <미부기시덴> 의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인데요. 이 배우에 관해서는, 이 배우의 아버지와 오즈 아스지로 감독 이야기와 함께 나중에 기회를 내어 따로 이야기를 할께요. :)
어쨌든 영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음양사> 연작을 보고 나서 다시 한 번 소위 <대중문화> 를 향유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조금 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말들을 끌어다 붙이면서 썰을 풀어대지만 자세히 보면 말만 잘 하는 사람일 경우가 열에 아홉이라고 할 수 있고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소위 <짬밥> 이나 인터넷 검색엔진이나 참고 자료 등의 힘을 빌어 글을 써대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뭐 대중을 대상으로 학술논문을 적어 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그냥 서로 넘어가주는 게 요즘의 조류인 것 같습니다만(사실 저는 별로 참아주고 싶지는 않아요), 문제는 이게 다수를 <호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유명한 이름에 홀리고 현란한 문장에 홀리는 순진한 다수를 호도하는 나쁜 글들이 정말 많은데요. 모르는 걸 <모른다> 라고 안 쓰고, 억지로 말도 안 되는 걸 갖다 붙여서 까대느라 바쁘기만 한 자들이 세상에 널려 있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흑...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고 있는지 친구들은 알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도 안 되는 썰을 이 영화 <음양사> 에 갖다 붙이면서 잔뜩 현학적인 척 하는 평을 보고, 조금 속상해지는 마음에 적어보았습니다.